H(Homeless)세대의 원인을 찾아 나서다

거리에 나앉은 젋은 청춘, H세대

집(Home)도 희망(Hope)도 없이 사는 그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그들이 지옥(Hell)에서 사는 원인은 무엇일까.
청춘(靑春),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사전적 의미 무색했다.
정작 거리 새싹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메말라가고 있었다.
이런 새싹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은 오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젊은 놈이" 라는 비아냥 섞인 말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더욱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삶을 가만히, 또 온전히 듣기 전까진 거리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두 눈과 귀로 담기 시작했다.

[H세대 : 갈매기도 집이 있다①]
거리에 남겨진 순간, 불안감은 동반자가 된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모텔 객실청소, 편의점 알바, 전단지 알바 등 면접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돌아다녔다. 아쉽게도 그를 선택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살기 위해 옷과 생필품을 훔친 것이 화근이다. ‘좀도둑’, 사회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좀도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과자라는 주홍글씨는 그가 사회에 조심스레 발을 딛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금전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거리의 삶이 주는 무게가 그의 신체 곳곳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결국 스물 넷, 젊은 나이에 당뇨를 달고 살게 됐다. 치료가 필요했다. 돈이 필요했던 그는 당시 유행하던 ‘지라시 대출’에 손을 댔다. 지라시 대출은 명함에 적혀있는 전화로만 대출을 할 수 있는 불법사채(미등록 대부업)다.

급한 불을 끄고자 빌린 대출은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사채 빚은 삶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서서히 늘어나는 숫자는 그의 삶을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더욱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는 그렇게 사회와 단절된 채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랍스터와 고기 그리고 나

그는 거리 곳곳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하루를 버틸 음식을 찾았다. 배고픔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버려지는 음식의 질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 주로 비싼 음식이 버려지는 곳은 강남역 인근이다. 운이 좋은 날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먹다 버린 랍스터 조각과 고기를 발견할 수 있다.

비싼 음식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당뇨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버려진 쓰레기를 먹으면 먹을수록, 혹은 굶으면 굶을수록 손끝과 발끝이 이상하리 만큼 저리다. 밥다운 밥이 먹고싶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건더기가 푸짐하게 올라간 국이면 됐다. 임금님 수라상 같은 식사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를 위해선 결국 ‘돈’이 필요했다.

‘꼬지’(노숙인이 구걸을 칭하는 은어)하기 좋은 장소는 이미 다른 노숙인이 터를 잡고 있었다. 괜히 그 근처를 어슬렁 거리다 욕과 발길질을 보기 좋게 얻어먹었다. 텃세다. 노숙인들의 텃세는 생각보다 드셌다. 구걸하기 안성맞춤인 장소는 그들이 가진 몇 없는 벌이 수단이자 노른자 땅이다. 이를 뺏기지 않으려 더욱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계속해서 쓰레기를 먹고 살 순 없잖아요?”

그는 노숙인의 텃세를 피해 젊은 이들이 많은 번화가 ‘건대입구’로 향했다. 처음에는 꽤 벌이가 괜찮았다. 젊은 이들이 주는 동전, 직장인이 주는 지폐는 진눈깨비 쌓이듯 조금씩 쌓여갔다. 운이 좋은 날이면 하루에 몇 만원이라는 돈이 수중에 쥐어졌다. 10년도 더 된 휴대폰 요금을 내고 가끔 밥을 사먹을 수 있는 정도.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늘 그랬듯 술에 취해 담배를 피고 있는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구걸을 위해 말을 걸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러곤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술에 취한 젊은 사람이 그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손 쓸 틈도 없이 그는 그렇게 맞고만 있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그를 폭행했던 젊은 청년은 유유히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젊은 청년을 보며 그는 다급히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신고를 해도 별 소득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이 노숙인이라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동전과 바꾼 성(性)...“동전이 없으면 그날 또 굶어야 하잖아요”

그는 숱한 폭행에도 건대 입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돈이 뭐기에. 그는 무작정 구걸하는 것 보다 다른 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성과 동전을 맞바꾸는 성매매를 선택한 것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한 대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버림받는 것에 익숙해진 그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육체와 영혼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동전은 쌓여만 갔다. 그는 자그마한 그 동전들로 하루하루 버텨냈다. 하루는 젊은, 또 하루는 나이가 많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동전 하나를 두고 한 침대에 남겨졌다. 그 시간이 6개월이나 지속됐다. 그렇게 아무런 감정 없는 인형과도 같은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화대(花代)로 동전을 요구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평소와 달랐다. 그는 또 이름 모를 젊은이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화대로 요구한 동전? 주기 싫으면 못주겠다 하고 끝내면 되는데 왜 나를 막 때리는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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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세대 : 갈매기도 집이 있다②]
내 나이 열다섯, 지하 주차장에서 잠을 청했다

초졸에 찍은 학업 마침표, 살아남기 바빴다

현재 그의 학업은 초등학교 졸업에서 멈춰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기엔 먹고살기 바빴다. 아니, 살아남기 바빴다. 식사 횟수가 일정하지 않은 탓에 하루 하루가 고민이었다. ‘오늘 하루 뭘 먹어야 할까’, 아직 어린 중학생이 눈을 뜨며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이다. 현수씨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배고픔’이 가장 힘들었다고 전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7일 이상 굶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 땐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었다. 스스로 음식을 구할 능력이 안 되면 자연스럽게 쓰레기통을 뒤져 먹게 된다. 무료급식은 그에게 높은 장벽이었다. 무료급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관련 정보들은 주로 노숙인 무리에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어떤 무리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무료급식자체를 몰랐어요. 저는 다른 노숙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다녔으니 정보를 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노숙자들끼리 오늘은 어디서 밥이 나온다. 어디가 밥 맛이 좋다. 이런 정보들이 노숙인들 끼리 공유가 돼요. 그리고 도서관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찾는 것도 은근히 어렵고 까다로워요. 노숙인들 사이에서 주로 정보를 얻죠.”

이따금 젊다는 이유로 던져주는 돈 몇 푼, 그리고 도시락 몇 개, 이마저도 없으면 쓰레기통. 이것들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꽤 오랜시간 노숙을 하니 함께 다니는 노숙인도 2명 생겼다.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적거리거나, 혹은 잠들기 좋은 곳을 함께 찾아다니는 무리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거리의 삶을 살아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던 노숙인 한 명이 사망했다. 그 노숙인은 배가 고팠기에 누군가 버린 음식을 먹었다. 이 마저도 힘들면 이따금 쓰레기통을 찾아 해맸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병이 있던 노숙인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손쓸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오래가지 않아 또 다른 노숙인이 사망했다. 함께 몸 뉘일 곳을 찾던 노숙인이다. 추웠던 지난 겨울 겹겹이 휘감은 옷을 비집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서울역에서 멀리 떨어진 장애인 화장실, 차디찬 바닥에서 새우잠에 들었다.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바닥은 그의 숨을 단번에 앗아갔다. 함께 지내던 두명의 노숙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제 주위에 있던 노숙자들은 그렇게 다 죽었습니다”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요동치고 있었다. 의지하던 노숙인 2명이 사라지자 그는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극심한 외로움은 그를 더욱 거세게 몰아세웠다. 어느새 그는 허공에다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밥 먹었어?”, “응 밥 먹었어”, “뭐 먹었어?” 따위의 일상적인 대화. 현수씨 주위엔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기에 본인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린 현수씨는 술로 현실을 달래기 시작했다. 마시고, 취하고, 잠들고. 또 마시고, 취하고, 잠들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 시간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현수씨는 더욱 더 깊은 우울에 빠져들었다. 결국 오랜시간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게 된 계기는 ‘폭행’이다.

어느날 밤, 공원 벤치에서 잠에든 현수씨 멀리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서서히 현수씨를 향했다. 현수씨는 못들은 척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현수씨 바로 앞에서 그 웃음소리가 멈추자, 묵직한 무언가가 그의 등을 힘껏 후려쳤다. 현수씨 등에 남겨진 발자국 하나. 잔인했던 두명의 웃음소리는 손 쓸 틈도 없이 저만치 멀어졌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같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 분하고 억울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는 마포대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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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세대 : 갈매기도 집이 있다③]
젊은 빈털터리의 고향은 인천공항

현수씨는 어린나이부터 먹고 살 길을 걱정했다. 꿈을 위해, 혹은 학업을 위해 대학을 간다해도 등록금이 발목을 잡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특성화고‘ 홍보책자가 보였다. 특성화고는 특정 분야에 대한 인재나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특성화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다. 사실, 현수씨에겐 취업을 위한 학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막연히 고졸취업이 잘 된다고 하니 선택한 길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수씨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이따금 자기네 집에 놀러 오라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은 어떤 곳일까. 단순히 거주지의 개념을 넘어선 그 곳은 현수씨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문을 열면 온전히 나를 위한 밥과 반찬 냄새가 코 끝을 찌를 것만 같다. 혹은 부모님들이 시청하는 드라마 소리가 들려올 수 있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동생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거나, 현수씨에게 집은 그런 곳이었다. 안락한 집에선 제 나이에 맞게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을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집에 놀러오라는 말이 그렇게 부러웠다. 현수씨는 친구의 놀러오라는 말을 뒤로한 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현수씨가 처음 눈 뜬 곳이 보육원이니, 보육원이 제 집이라 생각했다. 보육원 구성원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 생각했다.

축하받을 고졸 취업은 보육원 퇴사 자격요건

고등학생의 현수씨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온전히 학업에 매진한 덕분에 무리 없이 고졸 취업에 성공했다. 현수씨의 첫 직장은 자동차 서스펜션을 만드는 자그마한 회사다.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현수씨도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육원에선 취업을 했으니 이제 나가야 한다 말한다. 현수씨는 아직 보육원 밖으로 나갈 준비가 안됐다. 두려웠다. 혼자서 모든걸 해결하기엔 너무 어렸고 당장 갈 곳도 없다. 그저 취업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퇴사 자격요건이 충족됐으니 나가야만 한다. 이를 어길 순 없었다. 그렇게 현수씨는 제 집 같던 보육원과 그 안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졌다.

혼자 사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했다.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툴고 부족했다. 가족 같은 보육원이 그리웠다. 그래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물 밀듯 밀려오는 공허함을 견뎌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버티고 또 버텼다. 2년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회사는 묵묵히 버텨오던 현수씨와는 달랐다.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경영난이다. 언뜻 코로나19로 인해 경기가 많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봤다. 나와는 상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코로나19는 현수씨의 직장과 현수씨를 동시에 무참히 삼켜버렸다.

회사 밖으로 밀려난 현수씨의 상황은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어긋난다면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죽기 살기로 일자리를 구했다. 물류센터 단순 노동직이다. 그렇게 현수씨는 물류센터로 향했다. 지게차를 몰 줄 아는 덕에 자격증도 문제 없이 취득했다. 한두 달 잘 다녔다. 영하를 웃도는 한겨울, 추운 줄도 모르고 일했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강을 꽝꽝 얼려버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수씨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몸이 이상하다. 땀은 흐르는데 몸은 으슬으슬했다. 몸이 너무 아파 병원을 가니 독감이라고 한다. 몸 이곳저곳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수씨는 그렇게 5일간 몸져 누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가 바보같나요?“

회사는 냉정했다. 다른 직원을 뽑았으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해고통보. 현수씨에겐 사망선고와 마찬가지였다. 제 몸 하나 신경 안쓰고 죽어라 일만 했다. 그런데 해고라니, 사회는 현수씨의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현수씨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 하나 현수씨를 품어주는 곳이 없었다. 가리지 않고 보는 면접은 보는 족족 낙방. 월세는 속절 없이 밀려만 간다. 모아둔 돈도 바닥이 보인다.

결국, 소액대출 100만원을 받았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100만원이 현수씨의 삶을 보기 좋게 망가트렸다. 대출에 필요하다길래 전송한 서류들이 화근이었다. 사회경험이 부족했던 현수씨는 그 서류들로 대포통장을 만들 줄 상상도 못했다. 대포통장 신고로 인해 기존의 통장들은 정지됐다. 새로운 통장은 만들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통장이 막히니 일자리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대포통장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았다. 벌금형 200만원. 당장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데, 200만원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현수씨는 그저 돈 100만원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벌금 200만원이 생겼다. 벌금을 내지 못하자 가진 것들 하나둘 압류 됐다. 손 쓸 틈 조차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결국 22살의 현수씨는 노숙을 하게 됐다. 그렇게 현수씨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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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세대 : 갈매기도 집이 있다④]
내 집은 창고, 원룸, 고시원, 그리고 거리

“아빠 배 타고 올게”

용호씨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부모님은 이혼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였기에 용호씨는 혼란스러웠다. 용호씨가 꿈꿨던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은 말 그대로 꿈이 됐다.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기에 더욱 잔인하게 다가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따로 살기 시작하자 불행이 시작됐다. 어머니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마저 집을 나섰다.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용호씨는 형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1살 터울의 형은 아직 가장의 노릇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힘을 합쳐 이 역경을 헤쳐나가기엔 그 둘은 너무 어렸다. 그저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던 친척들은 용호씨와 형에게 보육원을 권했다.

용호씨는 보육원 가는게 싫었다. 분명 아버지가 존재하는데 왜 보육원에 들어가야하는지 납득이 안 됐다. 친척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용호씨는 보육원으로 향하게 됐다. 용호씨의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용호씨는 낯선 보육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입을 막고 울며 지냈다.

보육원에서 기나긴 학창시절을 보낸 용호씨는 한 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인 사회복지사와는 거리가 멀어 방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휴학을 선택하게 됐다. 대학교 휴학은 보육원 퇴사 사유다. 그렇게 용호씨는 보육원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떙볕이 내리쬐는 사회로 향했다. 보육원 밖을 벗어나 용호씨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제주도에 위치한 한 고깃집이었다.

내 집은 창고, 원룸, 고시원, 그리고 거리

제주도 작은 고깃집에 자리를 잡은 용호씨의 첫 집은 창고다. 가게 주방, 서빙을 도맡아 하던 젊은 청년이 기특했던 사장님은 가게의 자그마한 창고에서 용호씨가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용호씨에겐 창고가 소중했다. 적어도 그 창고에선 먹고 자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벌어둔 월급으로 짧은 제주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남양주로 향했다.

보증금 400만원에 월세 45만원, 핸드폰 가게에서 일을 하기 위해 남양주로 건너온 용호씨가 마주한 집 값이다. 제주도에서 넉넉히 벌어놨던 덕에 휴대폰 가게 인근 원룸에 무사히 입주하게 됐다. 그리 크진 않지만 집다운 집이다. 뿌듯했다.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써 최선을 다 해 일했다. 휴대폰 가게 사장님도 그런 용호씨를 각별히 아꼈다. 스스로 돈을 벌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워질 무렵, 코로나19라는 비극이 용호씨를 기다리고있었다.

“사장님, 저희 가게는 문 안닫죠?”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를 보고있자니 용호씨는 걱정이 앞섰다. 사장님은 걱정말라며 용호씨를 다독였다. 용호씨는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출근을 이어갔다. 그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코로나19 거리두기 단계가 2단계로 격상되는 순간, 휴대폰 가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용호씨는 그렇게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게 됐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그 마저도 쉽지않았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월세는 정확한 날짜에 칼같이 빠져나갔다.

돈이 서서히 바닥나자 결국 용호씨는 보증금이 없는 고시원으로 향했다. 금방 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보증금을 보태 월세를 충당하며 알바를 구할 심산이었다. 무보증금에 월세 32만원, 용호씨는 영등포에 위치한 고시원으로 향했다. 지내던 원룸보다 훨씬 작고 열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리에 나앉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고시원 생활을 이어갔지만 작은 알바자리 하나 쉽게 구하지 못했다. 코로나19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간 모아놨던 돈도 바닥이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북극한파 11월, 거리로 향하다

“첫 월급 받을 때까지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돈은 바닥나고 일자리는 구해지지 않자, 염치 불구하고 고시원 주인에게 건넨 용호씨의 조심스러운 한마디였다. 주인 역시 경제적 상황이 녹록치 않아 이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용호씨는 가진 게 적었다. 코로나19는 그 마저도 모두 앗아갔다. 가진 게 적어서일까 그 충격은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했다. 국군장병라운지 청량리역 TMO가 용호씨의 다음 집이 됐다. 22살, 아직 어린 나이에 온 몸이 으스라질 것 같은 충격을 감수해야했다.

청량리역 TMO 문 앞에서 용호씨는 잠을 청했다. 바닥은 딱딱했고 온 몸을 할퀴는 찬 바람이 연일 용호씨를 괴롭혔다. 발 끝이 너무 아팠다. 잠을 자지 않으면 뜬 눈으로 그 고통을 겪어야 했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잠에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딘가 허전하다. 머리맡에 둔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용호씨의 가방을 훔쳐간 것이다. 결국, 몸뚱이를 제외하면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됐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럴수록 용호씨는 더욱 더 무기력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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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노숙인들... 비효율적 복지가 채운 족쇄 기사보러가기
  • 빈곤이 개인적 결함이 아닌 사회구조에서 파생하는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자체 차원에서 청년 노숙인 관련

    인식변화가 있어야 한다.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 정재훈 교수

  • 일가친척 없이 망망대해 혼자인 삶은 실패의 결과도

    더 가혹할 수 밖에 없다.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 의자할 곳도,

    상의할 곳도, 도움을 받을 곳도 적거나 없다.

    국회 입법조사처 / 허민숙 조사관

  • 사회진입 초기의 기초자산을 형성해 주려는

    사회적 결단이 필요하다.

    출발선을 중간중간에라도 맞춰야 한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격차가 벌어져 있다.

    서울시의회 / 권수정 의원

  • 우리는 사회로 나갈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아

    어쩔수 없이 노숙하게 된 젋은 노숙인이 누구의 자녀,

    한 가정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하질

    못하는 것 같다.

    프레이포유 / 손은식 목사

  • 거리로 나온 친구들 중 가정에서 버림을 받은 친구들도 있지만,

    스스로 가정을 버린 친구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가정 밖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촘촘하지 않다.

    사랑의 쌀 나눔운동본부 / 이선구 이사장

  • 코로나 19로 얼어붙은 경제시장과

    바늘 구멍 같은 일자리는 젊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 수 있는 위험성을 더욱 높이고 있기에

    현시점에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안나의집 노숙인자활시설 / 유제민 시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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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음료를 받고 골목으로 사라지려는 내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노숙 선배다. "아유, 왜 그 짝으로 가! 따라와 이놈아"

Day1 굶주린자가 만든
한 쪽짜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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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휴대전화 번호를 작성하셔야 해요. 휴대전화 번호요” 의료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Day4 밥 한 끼에 담긴
희로애락(喜怒哀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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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손에 음식을 든 채로 대합실 이곳저곳을 훑기 시작했다. 대합실 안에서 이 음식들을 먹기엔 다소 눈치가 보였다.

Day3 마음의 온기가 담긴
밥은 식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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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하니 이상하다. 가진게 적은 사람들은 제 몫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 나누려 한다.

Day5 가진게 적을수록 더
많이 나누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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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무료급식소가 보였다. 줄도 얼마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Day2 식사에도 계급과
절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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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자가 만든 한 쪽짜리 지도
서울시 노숙인 밥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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